본문 바로가기

원고

한국에서의 고준위핵폐기물 문제 공론화의 쟁점과 과제

<2008.4.14. 韓国の脱原発学習交流集会(일본, 도쿄) 발표문>

한국에서의 고준위핵폐기물 문제 공론화의 쟁점과 과제

이헌석(청년환경센터)

0. 들어가며

한국의 반핵운동에서 핵폐기장 반대운동은 빼놓을 수 없는 사안이다.

90년 안면도 핵폐기장 반대운동, 95년 굴업도 핵폐기장 반대운동, 2003년 부안 핵폐기장 반대운동 등 20여년동안 9차례나 크고 작은 핵폐기장 반대운동이 있었고, 그 때마다 담당 장관이 교체되거나 대통령 비서실에서 직접 문제를 다룰 정도로 중요한 정치적 사안이기도 했다.

우여곡절 끝에 정부는 2004년 중저준위핵폐기물과 고준위핵폐기물을 분리하여 핵폐기장을 선정하는 방식을 채택했고 2005년 주민투표 방식을 도입하여 최종적으로 경주가 중저준위핵폐기장 부지로 선정되었다. 2009년 완공을 목표로 건설되고 있는 경주 중저준위핵폐기장 (지역주민들의 반발을 고려하여 공식적인 명칭은 ‘월성원자력환경관리센터(月城原子力環境管理センータ)’로 정해졌다.) 건설로 많은 이들은 핵폐기장 문제는 이제 끝난 문제로 인식하고 있다.

그러나 아직 문제는 끝나지 않았다.

중저준위핵폐기물에 비해 더욱 위험하고 복잡하며 처분할 방식조차 정해지지 않은 고준위핵폐기물 문제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 특히 지역자치단체에 막대한 금액의 지원을 약속하고 중저준위핵폐기장을 건설하고 있기 때문에 방사선 준위(放射線 準位)로 보나 처분 기간으로 보나 월등히 높은 고준위핵폐기물 문제를 어떻게 처리할 지는 남은 과제 일 수 밖에 없다.

이 글은 2005년 핵폐기장 주민투표 이후 지금까지 핵폐기장 문제를 둘러싼 한국내에서의 변화와 향후 일어날 문제점들에 대해 정리해 보고자 한다. 새로운 정권이 들어선 2008년. 이 문제는 이제 피할 수 없는 상황이 될 것이다. 또 다시 20여년동안 반대-추진-백지화를 반복할 것인지, 아니면 보다 합리적인 해결책을 찾을 것인지는 전적으로 한국정부의 판단에 달려있다. 최악의 선택을 한국 정부가 하지 않기를 바라며 글을 시작한다.

1. 경주가 중저준위 핵폐기장 부지로 선정된 이후

2005년 11월 3일.

경주, 군산, 영덕, 포항. 4군데 지역에서 중저준위핵폐기장 찬/반을 묻는 주민투표가 열렸다.

주민투표 방식으로 핵폐기장 건설을 추진하려는 정부의 계획에 대해 지역주민들과 환경단체는 모두 반대의사를 표명했다.

먼저 핵폐기물 문제는 ‘사회적 논의와 합의’를 통해 온 국민이 정해야할 에너지 정책(전력정책)에 관한 문제이지 단지 어느 지역에 핵폐기장을 지을 것인지 말 것만을 정할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는 2003년 부안 핵폐기장 반대운동이 있기 이전부터 지역주민들과 환경단체들이 계속 주장해 오던 바였다. 그동안 한국은 핵발전 위주의 전력정책을 추진해 왔으며 이로 인해 핵폐기물 문제가 심각해졌으니, 먼저 핵발전 위주의 전력정책을 추진 할 것인지부터 논의를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또한 한국에서는 아직 주민투표제도가 제대로 정착되지 않은 상황이라 법률적 허점이 너무 많고 이에 따라 금권선거(돈을 오고가는 주민투표), 관권선거(공무원들이 선거에 개입하는 주민투표)로 변질될 가능성이 높다는 점 역시 지적되었다. 우려했던 바 대로 11월 3일을 전후로 공무원들의 조직적인 선거 개입과 각종 금품 살포 행위가 주민투표 내내 큰 문제가 되었다.

이러한 반대논리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주민투표 방식을 통해 중저준위핵폐기장 건설을 강행하였고, 정부 계획 추진에 큰 역할을 한 것은 “3000억원 + 알파”라는 지역자치단체에 대한 직접적인 지원책과 한국수력원자력 본사이전과 4조 5천억원에 달하는 간접적인 지원책이었다. (4조 5천원의 간접지원금은 주민투표 이후 축소되어 결국 3조 2천억원이 되었다.) 최근 경제 회생, 지역경제 활성화에 관심이 높은 지역주민들의 이해관계를 잘 이용한 이러한 회유책은 핵폐기장 주민투표가 진행되는 내내 반대운동을 하는 지역주민들과 환경단체를 괴롭히는 사안이었다. 사실 지역에서 핵폐기장의 안전성과 현재의 전력정책의 문제점은 전혀 쟁점이 아니었으며, “중앙정부에서 도대체 얼마를 지원해줄까?”가 주요한 쟁점으로 부각되는 가운데 결국 89.5%의 찬성률로 경주가 선정되었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찬성 측 지역주민들의 분열

그러나 본격적인 문제는 그 다음부터였다.

가장 먼저 불거진 것은 ‘한국수력원자력 본사’이전 위치에 대한 것이었다.

핵폐기장 부지로 선정된 지역은 월성 핵발전소 바로 옆 지역으로 경주시내에서도 자동차로 30-40분은 들어가야 하는 외딴 지역이다. 핵폐기장을 유치했던 지역주민들은 당연히 한국수력원자력 본사가 이 곳 - 폐기장 바로 옆에 들어올 것으로 예상하였고, 수백명의 직원이 근무하는 본사가 이전해 오면 식당이나 각종 상업지역이 번성할 것이라고 예상했던 것이다. 또한 그동안 돌린 유인물 등에는 이미지 사진으로 마치 한국수력원자력 본사가 핵폐기장 옆에 있는 것처럼 홍보하기도 했다.

그러나 경주 시내에 있는 사람들이나 한국수력원자력의 생각은 달랐다. 그 외딴 곳에 본사를 이전하기보다는 시내에 본사를 유치하여 시내의 경기를 활성화하고 보다 편하게 근무하기를 원했던 것이다.

이러한 생각의 차이와 충돌은 무려 1달 동안이나 지속되었다. 얼마전까지 핵폐기장 찬성을 외치며 다녔던 사람들이 한국수력원자력본사가 오지 않으면 반대운동도 불사하겠다며, 시위를 하기 시작한 것이다. 집회, 면사무소점거, 방화, 할복 갖은 시위방법이 동원되어 1달 동안 반대시위는 이어졌으며, 시내지역의 시위도 마찬가지 이유로 계속 이어졌다. 결국 한국수력원자력 본사는 시내와 핵폐기장 중간 지점으로 정해졌으나 이후 지원금 3000억원의 활용처를 둘러싼 논란, 4조 5천원 축소를 둘러싼 논란이 경주 지역사회뿐만 아니라 경주시의회 등에서도 계속 이어졌다.

2. 경주주민투표의 교훈

각종 지원책을 바탕으로 주민투표에서 압도적인 찬성률만 이끌어내면 문제가 잘 마무리 될 것이라고 생각했던 정부의 입장에서 주민투표이후 경주에서의 혼란은 매우 당황스러운 결과였다. 계획 추진과정에서도 3000억원이라는 거액의 지원금을 내건 것이 너무 무리한 추진이 아니었는가라는 내부 비판도 있었던 터라 밖으로는 “지역주민들 협조로 착공된 경주 핵폐기장”이라고 선전을 하지만 내부적으로는 “그럼 고준위핵폐기물 문제는 어떻게 풀어가야 하지?”라는 걱정이 교차될 수 밖에 없었다.

바꿔말하면 이전에는 찬성과 반대 두가지 입장만 있었다면, 각종 지원책이 나오자 서로의 이해관계에 따라 보다 복잡한 양상이 만들어지게 된 것이다. 크게는 자신의 지역에 지원금이 나올 수 있도록 해야 겠지만, 그 안에서도 자신에게 더 유리한 방법으로 지원금을 가져오기 위한 경쟁이 무한이 진행되는 것이다. 또한 이를 바라보는 외부의 눈길도 많이 달라졌다. 영덕 등 주민투표에서 패배한 지역에서 주민투표 직후 핵폐기장 유치를 주장했던 주민들이 “그럼 이제부터 우리는 고준위핵폐기물을 유치하자”는 이야기들이 나왔다거나, “지원금을 경주에 빼앗긴 군산시장을 선거에 심판하자”는 이야기들이 나온 것들은 국가의 정책판단과 무관하게 핵폐기물을 경제적 이익을 위한 수단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강해졌다는 것을 보여준다.

반면 반핵운동을 해 온 지역주민들과 환경단체들도 2005년 주민투표를 통해 많은 것을 배웠다.

주민투표과정에서의 공무원 개입, 금권 선거 시비, 그리고 엄청난 금액의 경제적 지원 약속 등이 있었지만, 89.5%의 경주시민의 지지율, 60%를 상회하는 다른 지역의 지지율은 반핵운동의 패배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이는 그동안 반핵운동이 사용한 운동 방식, 문제 접근법, 지역조직구성에 대한 문제들을 모두 다시 생각하게 만든 중요한 계기였다. 2006년 한국수력원자력 노동조합 등과 함께 에너지전환을 고민한 ‘에너지노동사회네트워크 에너지전환 프로젝트’, 국가에너지위원회 등의 창구를 이용한 문제제기 등은 2005년 주민투표가 있기 전에는 생각하기 어려웠던 일이었다. 국가정책의 문제점을 짚기 위한 활동가들의 노력, 반대를 넘어 대안을 마련해가려는 노력들은 아직까지도 진행형이며, 한 번의 큰 패배를 딛고 일어난 한국 반핵운동의 새로운 활로 모색의 하나이다.

3. 국가에너지위원회와 사용후핵연료 공론화 논의

이러한 가운데 2006년 중순 국가에너지위원회가 출범하게 된다.

대통령을 위원장으로 산업자원부(지금의 지식경제부), 과학기술부(지금의 인재과학부) 등 에너지 관련 장관들과 전문가이외에도 NGO 들의 참여가 법적으로 보장된 국가에너지위원회는 환경단체들의 요구에 의해 만들어진 위원회이다. 물론 국가에너지위원회가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환경단체들의 입장이 100% 반영되지 않아 애초보다 위상이 약화된 면이 없지 않으나, 국가에너지정책을 결정하는 위원회로서의 역할을 놓고 볼 때 NGO의 참여가 보장된 면은 매우 큰 잇점이다.

2007년부터 사용후핵연료 문제가 국가에너지위원회를 통해 논의가 진행되기 시작한다.(한국은 사용후핵연료를 재처리하지 않기 때문에 재처리과정에서 나오는 폐기물이 없다. 따라서 거의 모든 고준위핵폐기물이 사용후핵연료이다. 이러한 이유로 고준위핵폐기물과 사용후핵연료가 같은 용어로 많이 통용된다.)

한국은 그동안 사용후핵연료에 대한 정책적 결정을 거의 진행하지 않았다.

각 핵발전소 마다 보관되고 있는 사용후핵연료는 ‘임시보관’ 되고 있으며, 이를 한 장소에 모아 ‘중간저장’할 것인지, ‘처분’할 것인지, 아니면 ‘재처리’할 것인지에 대한 기본 계획조차 수립하지 않았다. 처분과 관련한 연구에 있어서도 유럽이 80년대부터 진행해 온 처분 방식에 대한 연구를 이제야 시작하여, 2006년에야 고준위핵폐기물 처분 연구를 위한 실증시설을 완공했다. 이러한 가운데 그동안 고민의 한 축이었던 중저준위핵폐기장 문제가 해결되자, 이제야 고준위핵폐기물에 대한 논의를 시작하고 있는 수준이다.

한편 한국은 한미원자력협정과 한반도비핵화 선언으로 사용후핵연료 재처리를 할 수 없는 상황이다. 특히 북한의 핵실험 이후 남한의 재처리를 북한을 자극할 우려까지 있는 것이어서 더욱 힘든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학계에서는 처분되어야 할 폐기물이 아닌 ‘재활용가능한 원료’로서 사용후핵연료가 다루어져야 한다는 주장을 계속 해 왔다. 과학기술부(지금의 인재과학부)에서도 이러한 주장에 힘을 실어 2014년 만료되는 한미원자력협정을 개정해서라도 사용후핵연료를 상업용 발전의 연료로 사용하겠다는 입장을 수차례 밝혀왔다.

지난 12월 발표한 과학기술부의 ‘미래원자력 로드맵(안)’은 한국정부 내에서 재처리를 주장하는 이들의 생각을 잘 들어내고 있다. 과학기술부는 미래 원자력발전의 동력으로서 소듐냉각고속로(Sodium-cooled Fast Reactor, SFR)에 집중적인 투자를 진행하며, 이의 가동을 위해 플로토늄 추출이 불가능한 Pyroprocess 핵연료를 만들기 위한 기반 기술에 적극적인 투자를 하기위한 로드맵을 밝히고 있다. 이 계획이 추진된다면, 한국은 2025년부터 사용후핵연료를 재처리하여 Pyro 핵연료를 생산하는 설비를 갖추며, 2027년까지는 소듐냉각고속로(SFR)의 실증로는 건설완료하여 본격적인 후행핵연료주기(後行核燃料週期)를 완성하게 된다.

물론 아직 이러한 계획은 정부부처 내에서도 많은 이견이 있다. 또한 이 계획을 추진하기 위한 엄청난 재원을 어떻게 확보할 것이며, 사용후핵연료 재처리를 위해 국제사회 - 특히 미국을 어떻게 설득할 것인지 등에 대한 계획이 빠진 허울좋은 장밋빛 환상에 불과하다. 그러나 사용후핵연료문제를 하나씩 풀어감에 있어 이러한 문제는 분명히 중요한 과제가 될 것이다.

이러한 가운데 국가에너지위원회를 중심으로 한 사용후핵연료 문제의 공론화(公論化 - Public and Stakeholder Engagement) 논의 또한 적극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영국 CORWM의 논의 방식을 바탕으로 한 공론화 진행방식은 과거 핵폐기장 논쟁이 있을 때 지역주민들과 환경단체들이 주장했던 ‘사회적 논의와 합의’를 통한 문제해결 방식의 일환이다.

공개성, 투명성, 민주성, 진정성(眞情性), 숙의성(熟議性 - deliberation), 독립성, 도덕성 등 다양한 원칙이 만족하는 공론화 추진기구를 구성하고, 지역주민, 해당전문가, 환경단체, 일반시민, 사업자, 정부 등 다양한 이해당사자들이 자신의 입장을 갖고 충분한 논의와 토론이 진행될 수 있도록 하는 과정을 사용후핵연료 문제 해결에 적용해 보자는 것이다. 영국 등 몇 개 국가가 이러한 방식으로 사용후핵연료 문제를 접근하여 나름의 성과를 거두고 있는 상황에서 한국 역시 이 방식을 적극적으로 도입하여 복잡하며, 각종 이해관계가 얽혀 있는 사용후핵연료 문제 해결에 실마리를 찾아보자는 것이 주요한 생각이다.

물론 이러한 생각이 현 정부에 얼마나 반영될 지는 모르겠다. 20여명의 위원이 참여하고 있는 국가에너지위원회 위원 가운데 NGO 출신은 5명에 불과하고, 현 이명박정부는 대화와 논의보다는 일사분란한 업무처리를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또한 한국수력원자력은 2016년이 되면 현재 핵발전소 내에 보관하고 있는 임시저장고가 포화되기 때문에 빨리 사용후핵연료 문제를 결정하지 않는다면 전력공급이 중단될 수 있다는 엄포까지 놓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4. 앞으로의 과제

사용후핵연료처분을 둘러싼 논쟁은 새로운 국면에 접어 들고 있는 한국의 반핵운동에 시험무대가 될 것이다. 사용후핵연료 문제 이외에도 한국반핵운동이 넘어야 할 산은 많다. 얼마 전 반대에도 불구하고 수명연장이 결정되었던 고리핵발전소 1호기 문제, 조만간 수명연장이 결정될 것으로 예상되는 CANDU형 중수로(重水盧) 월성 1호기. 더 이상 지을 장소가 없어 추가부지를 선정할 수 밖에 없는 신규핵발전소 건설문제, 인도네시아 등 해외로 수출을 시도하고 있는 한국 핵산업의 문제 등 산적해 있는 문제를 일일이 열거하기도 쉽지 않다.

그러나 아픈 과거로 남아 있는 핵폐기장 반대운동의 기억을 떨쳐버리기 위해서라도 사용후핵연료 처분 문제는 잘 해결되어야 한다. 경제적 지원책을 중심으로 정부는 언제든지 다시 지역주민들을 회유할 것이며, 이 악순환을 끊어내지 않는다면 ‘핵없는 세상’을 만들기 위한 노력은 결코 쉽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직 많은 한국 국민들은 사용후핵연료 문제를 잘 알지 못한다. 심지어 핵발전소 인근 주민들조차 내용을 모르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가운데 전국민이 핵발전 문제를 고민할 수 있다면, 이는 어느때보다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설사 사용후핵연료 문제 공론화 추진이 되지 않더라도 이는 반핵운동의 영원한 과제이며, 숙제일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2008년은 한국의 반핵운동이 새로운 출발을 하는 해이다.

반핵운동이 과거의 실패를 딛고 국민들과 함께 핵발전의 문제점을 짚어낼 것인가, 아니면 소수의 반핵운동가들의 활동으로 전락할 것인가. 한국의 반핵운동이 어떻게 나아가는지 일본의 반핵운동 동지들도 유심히 지켜봐 주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