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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고

거꾸로 가는 에너지정책 막아선 일본 시민들

함께사는 길 2008년 9월호 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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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꾸로 가는 에너지정책 막아선 일본 시민들 / 이헌석
핵에너지를 둘러싼 논란의 역사는 길다.
1945년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핵무기가 처음 사용되었을 때는 물론이고 냉전 시 각국의 군비경쟁 속에서 핵무기 확산은 언제나 중요한 논란거리였다. 이전의 어떤 기술보다 파괴력이 컸으며 그 피해가 세대를 넘어 이어졌기 때문이다. 이후 핵무기를 중심으로 한 논란은 아이젠하워 미국 전 대통령의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Atoms for Peace)’ 선언 이후 민간으로 이전된 핵기술 - 핵발전에 대한 논란으로 확대된다.

핵발전을 둘러싼 논란은 핵기술의 안전성, 에너지원 확보, 핵폐기물 처분 등의 문제로 이어지면서 더욱 복잡한 양상으로 발전해왔다. 미국의 드리마일이나 구 소련의 체르노빌 핵사고는 그 정점에 있었고 서구 유럽의 핵발전 포기선언으로 그 논란은 어느 정도 정리되는 듯 보였다.

그러나 최근 국제유가의 상승, 기후변화의 문제 심화를 계기로 핵산업계는 이 케케묵은 논란에 새로운 불씨를 지피고 있다. 이른바 ‘원자력 르네상스’가  바로 그것이다. 1980~90년대 안전성 논란으로 심각한 타격을 입은 핵산업이 2000년대 이후 이산화탄소 감축을 위한 각국의 노력에 힘입어 ‘부활’하고 있다는 것이 핵산업계가 밝히고 있는 ‘원자력 르네상스’의 실체다. 여기에 최근 국제 고유가 사태가 맞물리면서 핵산업계의 르네상스를 고하는 목소리가 어느 때보다 높아지고 있다.

일본 핵발전소를 덮친 강진
세계의 움직임이 이러한 가운데 6월 27일부터 4박5일 동안 열린 ‘반핵아시아포럼 2008(No Nukes Asia Forum 2008)’은 그 어느 때보다 뜨거운 열기로 가득했다. 1993년부터 시작된 반핵아시아 포럼은 반핵운동가들의 네트워크이자 매년 진행돼온 연례행사다. 지금까지 한국, 일본, 대만, 인도네시아, 태국, 인도, 필리핀 등 다양한 아시아 국가들의 반핵운동가들이 자국의 상황을 공유하고 공동행동을 모색해온 반핵아시아포럼은 매년 각국이 돌아가며 개최하고 있다.

올해 반핵아시아 포럼은 작년 7월 일어난 니가타현 주에쓰 오키 지진과 이 때문에 가동 중단된 가시와자키 가리와 핵발전소 운전 중지 1년을 맞아 동경과 가시와자키시를 오가며 진행되었다. 진도 6.8의 주에쓰 오키 지진은 15명의 사망자와 2천여 명의 중경상자, 천여 동의 건물 전파를 기록했다. 일부 파괴된 것까지 합하면 약 4만 동의 건물이 피해를 입은 대규모 지진이다.

가시와자키 가리와 핵발전소는 모두 7개의 핵발전소가 가동되고 있는 대규모 핵발전소 단지인데 진앙지와 인접해 있어 큰 피해를 입었다. 특히 내진설계 기준치보다 높은 지진이 발생함에 따라 화재, 방사능 누출과 같은 사고들이 잇달아 일어났다. 3호기 1층 터빈의 경우 설계기준치 834gal(중력가속도 단위) 보다 2배 이상 높은 2058gal을 기록했고, 원자로 기초건물의 경우에도 384gal(기준치 193gal)을 기록하는 등 많은 수치들이 ‘절대로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설계기준치를 훨씬 넘어서고 말았다.

당연하게도 이에 따른 피해도 속출해 3호기 화재사고, 6, 7호기 방사능 누출을 비롯, 저준위핵폐기물은 드럼통이 넘어져 드럼통 밖으로 방사능이 유출되거나 각 건물의 연결파이프나 도로가 갈라지는 등 크고 작은 사고들이 일어났다.

이 모든 것은 지진다발국가 일본에서도 예상치 못한 것들이라 더 불안감을 증폭시켰다. 심지어 소방본부와 핫라인이 개설되어 있는 비상대책실의 문이 지진으로 뒤틀리면서 몇 시간 동안 대책실에 들어가지 못해 주차장에 임시대책실을 차리고 휴대전화로 연락을 취해야 하는 상황도 벌어졌다.

지진 이후 7기의 핵발전소는 1년이 넘는 지금까지도 모두 가동을 중지한 상태다. 지자체와 중앙정부가 안전성이 확보될 때까지 이들 발전소를 무기한 가동 중단하기로 결정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지진의 발생으로 발전소 부지에서 새롭게 활성단층이 발견되는 등 새로운 문제들이 생기고 있어 가시와자키 가리와 핵발전소가 언제 다시 가동될지는 알 수 없는 상태다.

시민과학자, 시민전문가의 일본 반핵운동
세계 원자력계의 꿈인 ‘원자력 르네상스’의 시대에 가시와자키 가리와 핵발전소는 일본 원자력계가 감추고 싶은 치부일 수밖에 없다. 이미 오래 전부터 발전소 인근에 활성단층이 있을 수 있다는 지적이 있었지만 이를 적극적으로 조사하지 않았고 국민들에게는 ‘지진에도 안전한 핵발전소’만을 홍보해왔다.

이에 맞서 싸우고 있는 일본 시민사회의 노력은 우리의 그것과 확연히 다르다. 대규모 집회와 한두 명의 대중적 연사들이 큰 방향만을 언급하는 우리와 달리 일본의 시민사회는 집요하게 구체적 내용을 파헤치는 일본 특유의 ‘오타쿠(매니아) 근성’을 보여주고 있다. 이번에 열린 반핵아시아포럼에도 일반 시민들을 대상으로 한 강연이었지만, 지진과 주요기기에 미친 영향, 지역사회에 미친 영향 등의 내용은 매우 전문적인 것이었으며, 관련 분야 전문가들과 시민들이 함께 어우러져 궁금증을 해소하고 정보를 교환하는, 마치 잘 기획된 학교의 모습과도 같았다.

거의 모든 전문가들이 핵산업계와의 이해관계에 얽혀 있어 시민의 편에 서서 자신의 전문지식을 전달해주지 못하고 있는 우리의 현실과 1년 동안 착실히 관련 내용을 분석해 발표하는 일본 전문가들의 모습, 교수, 박사 등의 직함은 없지만 묵묵히 스스로 관련 분야를 공부해 전문가들과 동등하게 내용을 발표하고 의견을 제시하는 일본의 시민, 활동가의 모습은 참으로 대조적이면서 인상적이었다.

특히 발전소 인근에서 피는 기형 벚꽃의 개수를 일일이 세어서 대규모 지진과 방사선 누출이 이와 관련되지 않았을까를 발표하는 한 지역활동가를 보면서 언제나 현장에서 발로 뛰고 있는 진정한 시민과학자, 진정한 시민전문가의 모습의 전형을 떠올릴 수 있었다.

‘원자력 르네상스’의 허구를 깨기 위한 노력
르네상스란 암흑기가 있었다는 사실을 전제로 쓰는 말이다. 그렇다면 ‘원자력 르네상스’에서 암흑기란 서구 유럽이 1980년대 핵발전소 건설을 중단한 때로 볼 수 있다. 핵산업계 입장에서 볼 때 암흑기일 수밖에 없었던 이 시기는 체르노빌과 같은 대형사고와 시민사회의 끊임없는 문제제기로 만들어졌다. 이 기간 동안 유럽 각국은 다양한 재생에너지를 실험해왔고, 이제는 재생에너지로 에너지원을 바꾸는 것에 큰 이의를 제기하는 집단 없이 21세기를 맞고 있다.

하지만 이 기간 동안 핵발전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한 국가들은 전혀 다른 선택을 했다. 한국과 일본 등이 대표적인 국가다. 이들 국가는 시민사회의 문제제기와 반핵의 국제적 흐름에도 개의치 않고 핵발전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 채 핵발전소를 계속 건설하는 정책을 추진해오고 있다. 그 결과 재생에너지에 대한 가능성은 현실에 뿌리박지 못하고 에너지 수요를 채우기 위해 또 다시 더 많은 핵발전소를 지을 수밖에 없는 ‘핵발전 중독’ 상태에 접어들게 된 것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최근 정부가 발표한 ‘국가에너지기본계획(안)’은 현재 20기 수준의 핵발전소를 2030년까지 40기 이상으로 늘리기 위한 구상을 밝히고 있다. 또한 장기적으로 사용후핵연료 재처리와 새로운 원자로에 대한 연구개발도 계속 이어갈 것을 천명하고 있다.

이러한 정책적 오판의 미래는 이미 정해진 듯하다. 일본 가시와자키 가리와 핵발전소처럼 잠재된 사고의 위험성은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앞으로 돌발하게 될 것이다. 작은 문제점은 기술보완을 통해 감출 수 있지만 근본적인 위험은 은폐할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이에 대해 끊임없이 문제제기하는 시민사회의 흐름 역시 계속 이어질 것이다. 그것이 꼼꼼하고 전문적인 대응이든 대규모 집회와 시위를 통한 방법이든 진실을 밝히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노력은 계속 이어질 것이다. 그리고 그 흐름은 핵 없는 세상이 현실로 다가올 그날까지 지속될 것이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