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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문] 방사능 재해 대책, 원안위를 뛰어넘는 새로운 종합재난기구가 필요하다. - 후쿠시마 핵사고와 후타바병원 참사를 통해 본 방사능재난과 대책

<우리는 원전사고로부터 안전하게 대처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2014.5.21.), 아이들에게 핵없는 세상을 위한 국회의원연구모임 주최 토론회 토론문>


표와 각주, 그림이 포함된 자료입니다. (특히 웹상의 문서는 각주가 모두 빠져있습니다.) 정확한 내용은 첨부된 PDF 파일을 참조해 주시기 바랍니다.


140520_방사능방재_쟁점과과제_토론회토론문.pdf


 

방사능 재해 대책,

원안위를 뛰어넘는 새로운 종합재난기구가 필요하다.

- 후쿠시마 핵사고와 후타바병원 참사를 통해 본 방사능재난과 대책 -

 

 

이헌석(에너지정의행동)

 

1. 방사능 재난, 우리나라의 현황

우리나라에서 방사능 재난을 겪은 적이 있던가?

원자력시설 등의 방호 및 방사능 방재 대책법’(이후 원자력방호방재법)에 따른 정의와 그간 국가적 대응에 따르면 우리나라는 아직 방사능 재난을 겪은 적이 없다. 1998년 서울 원자력병원의 방사성동위원소 309개 도난사고, 2000년 울산의 방사성 동위원소 누출사고와 같은 방사선 동위원소 사고나 20112월 대전 원자력연구원의 하나로 원자로 백색비상 같은 사고들은 있었으나, “국가적 차원의 대처가 필요한 재난은 없었다.

 

사고의 규모와 파급효과 등을 고려할 때, 20113월 후쿠시마 핵사고 이후 국내 대처가 인접국가 원자력사고 대응 매뉴얼에 따른 방사능 재난의 하나로 취급되어 대응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당시 정부는 그와 같은 대처를 하지 않았다.

 

이처럼 방사능 재난은 단지 국내 핵발전소의 고장, 사고로 인한 것으로 국한되지 않고 방사성 동위원소의 분실, 도난, 핵테러, 인접국 핵발전소의 고장 사고로 인한 재난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다. 하지만 지금까지 시민사회의 논의는 주로 국내 핵발전소의 안전과 이에 따른 재난으로 논의가 국한되고 있는 측면이 있다. 사고의 파급력과 파괴력은 국내 핵발전소 사고가 더 크겠지만, 그간 역사를 통해 우리가 경험한 방사능 재난은 이보다 다양하며, 오늘의 논의 과제인 방사능 재난의 범위에는 이에 대한 광범위한 검토와 국가 차원의 재난 시나리오가 작성되어야 할 것이다.

 

 

1.1. 현재의 방사능 누출사고의 위기 경보 수준

구 분

방사선비상단계

판단 기준

비 고

관심

(Blue)

 

o 기기 고장, 종사자 실수, 절차의 결함 등으로 인해 운전요건을 벗어난 비정상적인 상태

발생징후가 있으나 단기간 내에 국가위기로 발전할 가능성이 낮은 상태

(국제원자력안전등급 1등급 수준)

징후활동 감시

주의

(Yellow)

 

o 방사선비상으로 확대 가능성이 있는 계통의 경보 발생

발생징후가 활발하게 탐지되어 국가위기로 발전할 가능성이 있는 상태

(국제원자력안전등급 1등급 고장 악화)

협조체제 가동 및 대비계획 점검

경계

(Orange)

백색비상

o 사고야기 및 확대 가능성은 나타나지 않지만 안전 계통에 심각한 기능 상실 발생징후가 구체적으로 인지되어 국가위기로 발전할 가능성이 매우 높은 상태

(국제원자력안전등급 2등급 수준)

대응태세 점검 및 대응체제 가동

심각

(Red)

청색비상

o 사고야기 및 확대 가능성 있는 안전계통에 심각한 기능 상실 발생징후가 현저하게 임박하여 국가위기로 발전할 가능성이 확실시 되는 상태

(국제원자력안전등급 3등급 수준)

즉각대응 조치시행

 

앞서 언급한 것처럼 현재 우리나라의 방사능 재난은 국내 핵발전소의 방사능 누출에 따른 대응을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나 실제 상황에서 이것은 매뉴얼에만 존재하는 것이었다.

 

대표적인 예가 20112월 대전에서 있었던 하나로 원자로 백색비상 발령사건이다.

2011220. 일요일. 오후 13분즈음. 원자로 수조안에 있어야 할 실리콘 반도체 생산통이 갑자기 수조 위로 떠올랐다. 이로 인해 원자로내 방사선량은 급증했고, 원자력연구원은 18. 원자로가동을 중단했다. 그리고 1시간 29분만인 232분 방사선 백색비상을 발령했다. 국내에서 백색비상이 발령된 것은 2002년 울진 3호기, 2010년 신고리 1호기 등 극히 일부로 손꼽힐 정도였고, 특히 인구밀집지 대전 한가운데 위치한 하나로 원자로에서의 백색비상은 매우 심각한 것이었다.

하지만 언론의 최초보도는 백색비상이 발령되고 2시간 이후인 430분에 나왔다. 방재매뉴얼상 비상발령시 30분내 언론에 공개해야 하며, 원자력사업자(이경우는 원자력연구원) 홈페이지와 교육과학기술부 홈페이지에 공개하도록 되어 있는 원칙은 어느것 하나 지켜지지 않았다. 4시 이후 백색비상이 내려진 이후 원자력연구원 대표번호는 전화 통화가 되지 않았고, 자연스레 주변 주민들의 불안감은 높아졌다.

 

더욱 황당한 일은 원자력연구원의 최초 보도자료에서 원자력연구원 부지경제 800m에서 측정한 방사선 값이 0.016 m/hr (=16μ㏜/hr) 였다고 발표했다가 저녁 7시경, 단위를 잘못섰다며 실제 값은 5~0.17μ㏜/hr 였다고 말을 바꾼 것이다.

 

후쿠시마 핵사고가 일어나기 약 20여일전. 우리나라의 방사능 재난의 현주소는 이러했다.

 

 

1.2. 방사능 재난과 대피는 실제와 많이 다르다.

재난 초기 정보를 어떻게 주민들에게 전달할 건인지에 대해서 일본은 그간 많은 연구를 진행해 왔다. 일본은 지진 발생시 강제로 해당지역 핸드폰에 경고음과 안내 문자를 발송하는 긴급재난문자시스템이 이미 도입되어 시행되고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경우, 2005년 해당시스템이 도입되었으나 3G 통신망에서의 호환성 때문에 많은 논란에도 긴급재난문자가 일률적으로 적용되지 못하고 2G4G에 대해서만 문자가 발송되는 반쪽짜리 시스템을 몇 년째 운영하고 있다. (다행히 4G 보급률이 올라가면서 숫자는 줄어들고 있지만)

 

이런 시스템이 있으면 주민들은 대피명령과 현 상황에 대해 명확히 이해할 수 있을까? 후쿠시마의 경우를 보면 그렇지 않다. 실제 대피령이 내렸던 지역 주민들을 대상으로 한 설문에서 응답자의 절반 정도는 대피하라는 내용의 지시를 해당지자체를 통해 들었다고 답했다. 동일본 대지진으로 다수의 이동통신망이 통신불능상황에 빠진 다중 재난상황에서 주민들에게 전달할 수 있는 방식은 마을의 방송장비와 차량을 이용한 가두방송이 사실상 유일한 것이었고, 이는 그대로 통계에서도 나타난다.

 



<후쿠시마 핵사고 당시 피난지시의 정보원>

 

이를 단지 지진과 쓰나미 상황이라고만 치부하는 것은 곤란하다. 실제로 대형사고 혹은 연말연시 통신 급증사태때 이동통신망의 불통은 매우 흔히 있는 일이며, 이를 보완하기 위한 방안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은 재난대비의 상식에 속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 이러한 정보를 얻은 주민들은 얼마나 빨리 대피했을까?

후쿠시마 핵사고 당시 일본 정부는 3차례에 나눠 3km, 10km, 20km 권역에 주민대피령을 내렸다. 이미 동일본 대지진으로 재난이 발생했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는 상황이었기에 방사능 재난에 대한 인지는 쉬운 편이었으나, 대피는 그렇지 않았다.

핵밪런소가 위치하고 있던 후타바정(双葉町, 인구 6,198)과 오쿠마정(大熊町, 인구 10,951) 주민들의 대피는 대피령이 내리고 거의 10시간 정도 걸렸고, 후타바 병원 환자들의 경우, 4일 이상 소요되었다. 계속되는 여진, 불안정한 도로상황, 이로 인해 차량수배의 어려움 등을 고려하더라도 수천~수만의 인구가 일률적으로 대피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이다.

 



<시간대별 피난주민의 비율>

 

우리나라와 마찬가지로 일본에서도 핵발전소 사고에 대비한 훈련을 정기적으로 진행한다. 그러나 실제 사고 이후 주민들을 대상으로 한 설문에서 핵발전소 최인접마을인 후타바정과 오쿠마정 주민의 12~15% 정도만이 사고를 상정한 대피 훈련을 받았다고 답하고 있다.




<사고발생전에 원자력발전소의 사고를 상정한 피난훈련을 받은적이 있다고 응답한 주민의 비율(100%:피난한 주민)>

 

후쿠시마 핵발전소보다 인구가 더 많은 일본의 다른 지역 대피 시뮬레이션은 더욱 구체적이다. 시가, 나가사키, 후쿠오카 등 규슈지역 3개현이 지난 430일 발표한 규슈전력 겐카이 핵발전소 중대사고 발생시 주민대피 시뮬레이션결과에 따르면, 반경 30km 이내의 주민 약 27만명이 30km 밖으로 대피하는데 걸리는 시간이 평균 24시간 50.(최소 9시간, 최대 30시간반) 30km 권내에 있는 섬 주민이 대피하는 데는 최대 5일이 걸릴 것으로 예상되었다.

 



<겐카이 핵발전소 반경 30km 밖으로 대피하는데 걸리는 시간>

 

이 시뮬레이션은 5km 이내에 사는 약 8천명이 먼저 대피해서 30km 권 밖으로 나온 이후(여기에 10시간 40분 소요), 5~30km 주민이 대피를 시작하여 단계적으로 대피하는 방법, 대피령이 내려지지 않았으나, 일부 주민이 자발적으로 대피하는 경우, 모든 주민들이 일제히 대피하는 방법 등 52개 경우의 수를 놓고 계산을 진행했다. 이들 3개현은 이 시뮬레이션 결과를 바탕으로 PAZUPZ를 재검토할 계획을 갖고 있다.

 

이와 같은 일본의 예는 최근 예방적보호조치구역(PAZ)와 긴급보호조치계획구역(UPZ) 지정에 대한 법률이 국회를 통과했지만, 그 면적과 실효성에 대해 충분히 지역주민들과 소통하지 않은채 법이 통과된 우리나라의 예와 너무나 다르다.






<각 시정촌 주민의 피난횟수(20123월까지)>

 

이와 함께 잊지 말아야할 것은 방사능 재난의 특성상 대피가 여러번 반복되고 이에 따라 피난민들의 스트레스와 불안감은 매우 높아진다는 사실이다. 후쿠시마 인근지역인 나미에정, 후타바정, 오쿠마정의 경우, 피난민의 40% 이상이 5회 이상 피난을 한 것으로 나타났으며, 이는 수차례 대피구역이 확대되고, 가설주택이 설치되기 전까지 여러 곳을 옮겨다녔던 것이 주요한 요인으로 보인다.

 

일본 정부는 동일본 대지진 이후 지진으로 인한 직접 피해 이외에도 지진재해관련사망(震災関連死)을 구분해서 통계·발표하며, 이를 줄이기 위한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

 

지진재해관련 사망의 정의

 

 "동일본 대지진 관련 자살"(1) 에서 (5) 중 하나의 요건에 해당하는 자살 을 말한다.

 

 (1) 시신 발견 장소가 대피소, 가설 주택 또는 빈소 인 것.

 (2) 자살자가 대피소 또는 임시 주택 에 거주하고 있던 사람임이 유족 등 의 진술 기타에 의해 판명된 경우.

 (3) 자살자가 재해지 (도쿄전력 후쿠시마 제1 핵발전소 사고의 피난 구역 , 계획적피난구역 또는 긴급피난준비구역을 포함한다.)에서 피난 온 사람임이 유족 등의 진술 등에의해 판명된 경우.

 (4) 자살자 주거(거주) 지역, 직장 등이 지진이나 쓰나미로 인해 막대한 피해를 입은 것이 유족 등 의 진술 등에 의해 판명된 경우.

 (5) 기타 자살 "원인 · 동기 "가 동일본 대지진의 직접적인 영향에 의한 것임이 유족 등의 진술 기타 에 의해 판명 한 것 .

예를 들면, 유서 등에 동일본 대지진 이 있었기 때문에 자살 하면 계정 이있는 경우

 생전 유족 등에 대하여 동일본 대지진 이 있었기 때문에 자살 하고 싶은 취지 의 발언이 있었던 경우

 

일본정부의 이와 같은 통계와 별도로 후쿠시마현 20개 시정촌과 일부 언론이 별도로 핵사고관련사망(原発事故関連死)을 구분해서 보도하고 있는데, 도쿄신문은 해당 지자체 집계를 바탕으로 올해 3월 핵사고 관련 사망자 숫자를 1,048명으로 집계해서 발표한 바 있다.

 

이들 사망자 대부분은 가설주택으로 옮기면서 사망한 고령자와 자살자로 방사능 재해의 유형이 단지 방사능으로 인한 피폭으로 국한되지 않고, 매우 복합적으로 이뤄지고 있음을 반증하는 사례이다. 그 가장 좋은 예 중 하나는 후쿠시마 현 후타바 병원에서의 비극이다.

 

2. 후쿠시마 후타바병원의 비극

 



<후쿠시마 핵발전소 인근 7개 병원의 피난시기와 교통수단에 따른 사망자 숫자>

 

후쿠시마 핵발전소 인근에는 대략 7개의 병원이 있었다. 후쿠시마 제1핵발전소에서 4.5km 떨어진 후타바병원은 그중에서도 시설이 가장 큰 병원으로 정신병상 350병상을 운영하고 있었고, 바로 인근에 98명이 입소하고 있던 노인보건시설 도빌 후타바가 있었다.

 

후타바 병원은 동일본대지진과 쓰나미로 인해 피해를 입지 않았다. 하지만, 여진이 며칠동안 계속되었기에 지진 이후 평온하지 못했고, 전기와 물, 가스 등 주요 인프라는 끊어진 상태였다. 311일 지진과 함께 후쿠시마 핵발전소의 상황이 나빠지자, 간 나오토 총리는 31121231차로 반경 3km 주민대피령을 내리고, 2차로 12544분 반경 10km 피난 지시를 내린다. 반경 4.5km 에 있던 후타바 병원은 이때 대피구역에 포함된다.

1212시 긴급히 마련된 버스 5대에 나눠 타고 자력보행이 가능한 209명과 원장을 제외한 직원이 철수하지만, 병원환자 130명과 도빌 후타바의 입소자 98명 등은 다음 번 대피를 위해 남는다. 하지만 1호기 수소폭발과 사령부와 현 재해대책본부의 연락문제 등으로 이들 환자는 이틀밤을 병원에서 보낸다. 200여명의 환자와 입소자들이 있었지만, 이들은 제대로 돌봐지지 않았고, 이후 도착한 구조대는 도착했더니 환자들의 분뇨 등으로 인해 병원에서 심한 악취가 났다고 증언하고 있다.

 

뒤늦게 도착한 구조대는 14일 오전 1030분 경, ‘도빌 후타바입소자 98명과 후타바병원 환자 34명을 싣고 출발하지만, 이들 환자가 매우 노쇠하고 심한 병을 앓고 있다는 사실은 전달되지 않는다. 최종목적지까지 직선거리는 70km 밖에 되지 않았지만, 방사능 피폭여부에 대한 심사와 우회경로 선택으로 결국 10시간 이상 걸려 남쪽 이와키 고요 고등학교에 도착한다. 도착한 환자들을 본 고요 고등학교 측은 수용이 불가능하다는 판단에 따라 환자를 분류하는 등으로 인해 학교에서만 3시간이 수요된다.

 



<후타바병원 환자들의 이송경로>

 

이 날 후송과정에서 2명이 숨지고, 도착 이후 12명이 숨지는 등 모두 14명이 사망하는 참사가 발생한다. 현지 언론은 이날, 도착한 학교 체육관에는 시트나 다다미를 깔고 히터를 켜고 잤으며, 들것이 없어서 학교책상을 이용해서 환자를 옮겨 환자 이송에만 2시간이 걸렸고, 환자에 대한 정보는 병명은 물론 이름도 알수 없었다고 안타까워하고 있다. 특히 구호물품이나 의료품은 전혀 공급되지 않아 학교 커튼을 잘라 기저귀로 사용하는 등 최악의 상황이 계속 이어졌다.

 

이는 남아있었던 100여명의 환자도 마찬가지였다. 143호기가 폭발하자, 같은날 저녁 후타바경찰서 부서장과 병원장은 위험하니 대피하라는 명령에 따라 인근 지역으로 대피한다. 수십명의 환자를 병원장 혼자 돌볼 수도 없는 상황이었지만, 사실상 병원의 환자들은 방치된 상황이었다.

 

결국 15이리 새벽까지 우여곡절을 겪으며 남은 환자들은 대피를 하지만 440여명의 환자와 입소자 중 50명이 사망하는 참극이 벌어졌다. 사망자는 대부분 후타바 병원에 있던 환자들이었고, 그 중 일부는 혼자서 병원밖으로 나갔다가 행방불명된 이도 있었고, 4월초 병원을 수색하던 중 새롭게 발견된 시신도 있었다.

 

이후 언론의 화살은 후타바병원장에게 집중되었다. 때마침 현 재해대책본부에서는 14일부터 병원근무자가 모두 대피했다고 밝혀 사실상 환자를 놓아두고 도망간 의사라는 오명이 따라다녔고, 이후 병원장은 경찰 지시에 의해 대피한 후 대기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알려졌으나 이미 뒤늦은 상태였다.

 

또한 유가족들은 이후 사망통지서를 받는 과정에서 사망원인으로 “**이라는 병명이 적힌 진단서를 받으면서 다시 한 번 분노한다. 이후 후쿠시마 핵사고 조사에서 후타바병원 사례는 중요한 문제로 제기되었고, 현재 유가족과 병원간에서 지난한 소송이 진행 중에 있다.

 

3. 소결 : 종합재난기구를 중심으로 방사능재난기구 마련

후타바 병원의 사례는 방사능 재난이 일반 재난과 얼마나 다른지를 보여주는 좋은 예이다. 위험성과 공포는 극단에 이르고, 이 과정에서 대책본부간 혼선은 극도로 심해진다.

이러한 측면에서 방사능 재난을 단지 방사능에 맞춰 준비하는 것은 매우 근시안적인 발상이다. 일본 사례에서 보듯 군, 경찰, 지자체와 주민의 합일된 움직임 없다면, 얼마든지 2, 3차 재난으로 이어질 수 있는 성격을 갖고 있다.

 

후쿠시마의 교훈을 생각할 때, 현재 원자력안전위원회를 중심으로 짜여져 있는 우리나라의 방재 시스템은 근본적으로 재검토되어야 할 것이다. 방사능 재해는 국가의 총력을 기우려야 줄일 수 있는 최대규모의 재난이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지금까지 방사선방재구역의 면적과 역할, 발전소의 상황 복구와 제염을 중심으로 방사능 재난 계획이 짜여졌다면, 이제는 재난에 방점을 찍고 재난 발생시 대응 체계를 중심으로 관련 논의를 모아 나가야 할 때가 아닌가 한다.


<부록>

일본 후쿠시마현 후타바 병원의 피난 상황

(a) 312일부터 14일 구출까지

312일 새벽 후쿠시마 제1핵발전소에서 반경 10km 이내에 있는 주민 등에 대한 대피 지시 (상기 (1) a 참조)를 받아 오쿠마정(大熊町) 소재의 후타바병원(双葉病院)에서도 1212시경 피난용으로 수배된 대형버스 5 대에 자력 보행이 가능한 환자 209 명과 스즈키 이치로(鈴木市郎) 후타바 병원 원장(이하 "스즈키 원장"이라한다)을 제외한 모든 병원 직원이 탑승. 당일 14시경 철수를 시작했지만, 이 시점에서 후타바병원 환자 약 130 명과 스즈키 원장, 같은 오쿠마정 소재의 후타바병원 계열의 개호(介護)노인보건시설 도빌 후타바” ( 이하 "도빌 후타바"이라 한다)의 입소자 98 명과 이 시설 직원 2 명이 남는다.. 그러나 오쿠마정은 이때 사용한 버스 5대를 후타바병원을 위해 준비했기 때문에 후타바병원 철수는 완료한 것으로 생각하고 이후 피난 상황을 확인하는 등 별도의 도치를 취하지 않았다.

 

한편 이날 15시경 육상자위대 제12여단 수송지원대는 피난구역 안에 남아있는 사람을 대피시키기 위해 고리야마(郡山)에서 오프사이트센터로 출발했다. 그러나 이 수송지원대는 오프사이트센터를 발견하지 못했고, 후쿠시마 제1핵발전소 1호기에서 수소폭발이 있었다는 소식을 라디오로 듣고 고리야마로 돌아왔다. 이에 따라 후타바병원의 환자 구출은 다음날 이후로 미뤄졌다.

 

후쿠시마현 재해대책본부(이후 현 재해대책본부)313일 오전 오프사이트센터에서 "후타바 병원 등 환자가 잔류하고 있다. 현재해대책본부에서 지원해줬으면 좋겠다"라는 의뢰를 받는다. 1313시경 현재해대책본부에 파견된 육상자위대 연락관(liaison)에 그 구조와 후송을 요청한다. 해당 요청을 받아 제12여단 수송지원대는 14일 자정 무렵, 대형버스 3대와 미니 버스 6대로 고리야마 주둔지에서 출발했다. 수송지원대는 이날 4시경 도빌 후타바와 후타바 병원에 도착했다.

 

요청에서 출발까지 약 한나절이 걸렸다. 이렇게 시간이 걸린 것은 제12여단 사령부와 육상자위대 동북 총감부와 조정을 위해서였다. 오프사이트 센터의 의뢰에 따라, 현 재해대책본부는 132140분경까지 후쿠시마 제1핵발전소에서 반경 20km 내에있는 병원과 잔류자 목록을 만들고 현재해대책본부 구조반이 이 목록을 기초로 심사(スクリーニング) 장소나 피난처의 조정을 시작하였다..

 

심사 장소는 목록에 있는 병원이 소소(相双) 지역에 위치하기 때문에 소소지구를 소관하는 소소 보건소로 결정되었다. 대피소에 관해서는 현내 병원을 요청했으나, 수용가능하다는 답변을 어디서도 받을 수 없었다. 또한 후타바 병원 환자의 대부분이 노쇠하다는 정보는 현재해책본부에 공유되지 않았고, 현 재해대책본부는 후타바 병원이 정신과 병원이기 때문에 체력적으로 문제가 있는 환자는 적을 것이라고 판단하고 수용 요청에 따라 이와키 고요(光洋) 고등학교를 피난처로 선정하고 해당 고등학교에 연락했다.

 

(b) 314일 구출 상황

314일 오전 4시경에 후타바 병원 등에 도착한 제12여단 수송지원대는 후타바 병원에 주재하고 있던 후타바 경찰서장 등 경찰관과 함께 스즈키 원장 등의 지시에 따라 이날 1030 분경까지 도빌 후타바에 잔류하고 있던 모든 입소자 98 명과 후타바 병원에 잔류하고 있던 환자 중 34명을 차량에 실어 소소 보건소를 향해 출발했다.

 

이 날 12시경, 수송지원대에는 소소 보건소에 도착해 환자들의 심사를 시작했다. 소소 보건소장은 이송 된 환자의 상태를 보고 심사장에 와 있던 민간 버스에 환승은 곤란하다고 생각하고 수송지원대에 이와키 고요 고등학교까지 자위대 차량으로 후송할 것을 요청했다.

 

본래대로라면 수송지원대에서는 후타바병원과 심사장 사이에서 환자를 실어 왕복수송할 예정이었지만, 이 요청을 받아 이와키 고요 고등학교까지의 후송을 결정하고, 12여단 사령부에 해당 계획을 연락한 후 15 시경 이와키 고요 고교로 출발했다. 이 때, 길 안내를 위해 소소 보건소 직원 1 명이 동행했다.

 

이즈음 정신과 병원을 담당하는 후쿠시마현 보건복지부 장애복지과는 현 재해대책본부와 별도로, 후타바병원 환자들의 피난처가 이와키 고요 고등학교가 되었다는 정보를 얻고 최종 후송처로 병원을 찾아야한다는 판단을 한다. 후쿠시마현립 의과대학 부속 병원, 후쿠시마 현립 아이즈(会津)병원, 타케다(竹田) 종합병원, 아이즈니시(会津西) 병원에서 총 82명을 수용할 수 있다는 승낙을 얻었다. 하지만 벌써 후타바병원 환자를 태운 버스가 이미 피난처인 이와키 고요고등학교로 출발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와키 고요 고등학교에 수용대상인원을 82명으로 조정할 수 있다고 연락했을 뿐 현 재해대책본부에는 별도로 연락하지 않았다.

 

12여단 수송지원대에는 소소 보건소에서 이와키 고요고등학교를 향해 출발하기에 앞서 이날 11시경 후쿠시마 제1 핵발전소 3호기가 수소 폭발했다는 정보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 수송지원대는 토호쿠 자동차도로 고리야마IC를 통해 이와키시로 향하는 경로를 사용하기로 한다. 그러나 지진으로 도로가 영향을 받아 고속도로에서도 속도를 높일 수 없어 소소 보건소를 출발한지 약 5 시간 후인 같은 날 20시경 이와키 고요 고등학교에 도착했다.

 

이와키 고요 고등학교는 환자를 받아들이는 것에 대해서는 현 재해대책본부에서 연락을 받고 알고 있었지만, 많은 환자가 노쇠한 상태라는 정보를 알고 있지는 않았다. 도착 이후 환자의 상태를 보고, 의사의 관리없이 의료 시설도 없는 체육관에서 환자를 받기 어렵다고 생각하여 수용을 거부했다. 그러다가 이와키 카이세이(開成)병원이 이와키 고요고등학교 의사 등을 파견할 것을 약속하고 이에 따라 이와키 고요 고등학교가 환자 수용을 수락하여 3142135분경부터, 환자를 버스에서 내리는 작업이 시작되었다. 이 때 후타바 병원에서 온 환자 30 명 중 8 명의 사망이 확인되었다.

 

(c) 315일 구조 전까지

한편, 12 여단 사령부는 3141330분경 소소 보건소에 도착한 제12여단 수송 지원대에서 후타바 병원 등에 남은 환자 대다수가 노쇠 환자이고 환자의 버스 탑승이 어려웠다는 것을 보고 받는다. 이에 추가 구조부대를 구급차를 중심으로 편제하고 의사를 동승시키는 것으로 했으나, 이 경우 제12여단만으로는 대응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동북총감부에 지원을 요청했다.

 

동북 총감부는 이 요청을 받아 동북대대 직할 부대인 동북 위생대 (의사, 간호사 등을 포함한다) 등으로 이루어진 통합임무부대의 파견을 결정하고, 통합임무부대는 315130 분경 구급차 5, 대형 버스 2대 와 미니 버스 1대 편제로 고리야마 주둔지를 통해 후타바 병원으로 향했다.

 

한편 제12여단 사령부는 314일 저녁 무렵 제12여단 위생대에 대해 후타바 병원 환자 구조를 지시하고 위생대 구급차 4대 편제를 후타바 병원을 향해 고리야마 주둔지에서 출발시켰다. 그러나 제12 여단 사령부는 31420시경부터 보도 등을 통해 핵발전소가 위험한 상태이다.”라는 정보를 일시적으로 얻어, 2115분경 제12여단의 전체 대대에 대해 임시 대피하라 는 지시를 내렸다. 이에 따라 이미 후타바 병원으로 출발했던 제12 여단 위생대는 고리야마 주둔지에 돌아왔다. 그 후, 12 여단사령부는 15일 새벽, 같은 위생대에 대해 다시 구호할 것을 지시했다.

 

한편, 후타바 병원에 있던 후타바 경찰서 부서장은 3142158, 센다이촌(川内村) 사무소에 설치된 후타바경찰서 긴급 대책실에서 원자로가 위험한 상태이기 때문에 현장에서 임시 이탈 하라는 무선 지시를 받아 스즈키 원장 등을 경찰 차량에 실어 센다이촌에 있는 와리야마(割山) 고개까지 대피시켰다. 이날 2210분 후쿠시마현 경찰본부 재해경비본부 ( 이하 경찰경비본부라 한다) 에서 현재 비상위험은 아니기 때문에, 구조 활동을 계속 하라고 지시가 있었기 때문에, 후타바경찰서 부서장은 후타바 병원 부근에 돌아 왔다. 하지만, 오쿠마정 안에는 자위대 차량이 없고 근처의 상황이 좋지 못해 오쿠마정에 머무는 것이 위험하다고 판단하고 다시 와리야마 고개로 대피했다. 다시 후퇴한 이후, 후타바 경찰부서장은 경찰경비본부에 와리야마 고개 부근에서 대기하고 후타바 병원 구조 자위대를 기다린다고 연락했다. 경찰경비본부는 현 재해대책본부에 파견되어있던 경찰연락관에게 같은 내용을 전달했다. 그러나 이 정보는 현 재해대책본부에서 공유되지 않고 육상자위대 연락관에게 전해지지 않았기 때문에 후타바 경찰서 부서장, 스즈키 원장은 후타바 병원으로 향한 통합임무부대나 제12여단 위생대에 합류할 수 없었다.

 

(d) 315일의 구출 상황

상기 (c)대로 315일 오전 130분경에 후타바병원으로 향했던 통합임무부대는 같은 날 9 시경 후타바병원에 도착해 환자의 구조 · 이송 활동을 실시했지만, 활동 중 휴대하고 있던 선량계의 경보가 연속하여 울렸다. 통합임무부대는 여성 간호사 5명을 동행시키고 있었기 때문에, 여성의 선량한도 (5mSv)에서 더 이상 활동을 계속하는 것은 곤란하다고 판단하였다. 이에 따라 47명에 대한 구조만을 진행하고 구조를 중단, 11시경 이 47명의 후송을 시작한다.

 

12 여단 위생대는 상기 (c) 15일 아침 다시 구조를 지시받아 구급차 4 대로 후타바 병원에 가서 이날 1130분경부터 병원에 남아 있던 환자 중 7명을 구조 했다. 그 무렵 이 병원 별채에 35명의 환자가 더 남아 있었지만, 위생대는 먼저 도착했던 통합임무부대와 합류하여 정보를 교환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들이 남아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 채 구출을 끝냈다. 1215 분경 이 7명만이 후송되기 시작했다. 위생대는 운송 중 휴대전화가 가능한 지역에서 제 12 여단 사령부에 후타바 병원 구조는 끝났다는 보고를 하고 제12여단 사령부는 그 내용을 현 재해대책본부의 육상 자위대 연락관에 연락했다.

 

그러나 제12여단 위생대의 부대장은 고리야마 주둔지에 돌아가오는 길, 대원에게서 "심사장에서 통합임무부대의 의사에게서 후타바 병원 별채에 아직 환자가 남아있다는 정보를 들었다는 보고를 받고 다시 남은 환자의 구조를 위해 가야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내용을 제12여단장에게 보고했다.

 

12 여단 사령부는 구조를 위해 수송지원대 대형버스 1, 마이크로 버스 2, 위생대 등 구급차 7대를 갖춘 혼성부대를 편성하고 2115분경 후타바 병원을 향해 출발해 316035 분께 병원 별관에서 잔류 환자 35명 구조를 시작했다.

 

(e) 317일 홍보 상황

317일 아침 무렵 일부 언론사가 같은 달 14 일 이와키 고요 고등학교에 후송된 후타바 병원 환자의 상황에 대해 보도한다. 다른 언론사들은 현 재해대책본부에 현황설명을 요구한다. 구조반은 1716시경, 지금까지 수집한 정보에 따라 후타바 병원 구출상황 등에 대해 “314일부터 16일까지 구출했지만, 병원 관계자는 한 명도 남아 있지 않았다.”는 취지의 내용을 발표한다.

 

그러나 위의 (b) (c)에서 보듯 스즈키 원장은 314일 오전 구출시 입회해 반송을 지휘했고, 1422시 이후에도 자위대와의 합류를 위해 와리야마 고개 부근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따라서 이 내용은 마치 14일 이후 병원 관계자가 일체 구조에 참가하지 않고, 병원을 포기하고 도망가 버린 듯한 것으로 부정확 또는 잘못된 내용이었다. 이는 위의 상황이 현 재해대책본부에서 공유되지 않은 등 구호반이 충분히 상황 파악을 하지 않은 것에 의한 것으로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