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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2011년 일본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 때 대피 체계 혼란으로 50여 명 사망한 후타바 병원의 참극


참사는 재난과 다르게 온다 [2014.06.02 제1013호]
[특집2] 2011년 일본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 때 대피 체계 혼란으로 50여 명 사망한 후타바 병원의 참극…
2차 재난을 막는 것은 국가 전체의 문제, 고리 핵발전소 ‘현장조치 매뉴얼’은 참조해야



원문 :  http://h21.hani.co.kr/arti/special/special_general/37136.html


일본 후타바 병원은 후쿠시마 핵발전소에서 4.5km 떨어진 곳에 있던 정신병원이다. 350개 병상에 대부분 치매·정신질환 환자가 있었고, 평균연령 80대로 고령자가 대부분이었다. 고령 환자인 탓에 암과 일반 질병을 함께 앓는 이가 여럿이었다. 정신과 말고도 내과·신경과 진료를 함께 받아야 했다.


첫 번째 버스 떠나고 오쿠마정 ‘대피 완료’

2011년 3월11일 동일본 대지진이 일어났을 때, 이 병원엔 모두 338명의 환자가 있었다. 병원이 내륙에 있어 쓰나미는 미치지 않았다. 지진 때문에 전기와 난방이 끊기고, 유선전화·휴대전화 연결은 매우 불안정했다. 지진 이후 후쿠시마 핵발전소 상황이 나빠지자, 일본 정부는 3월11일 밤 9시23분 발전소 반경 3km 안에 사는 주민에게 대피명령을 내렸다. 8시간이 지난 3월12일 새벽 5시44분에는 대피구역이 반경 10km로 확대됐다. 발전소 반경 4.5km에 있던 후타바 병원은 하룻밤 사이 대피구역이 됐다. 대피명령이 내려진 지 6시간이 지난 낮 12시께, 긴급 수배된 대형 버스 5대가 병원에 도착했다. 스스로 걸을 수 있는 환자 209명과 병원장을 제외한 모든 병원 직원이 대피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대피는 순조로워 보였다.




첫 번째 버스가 떠날 때만 해도 병원 관계자들은 나머지 환자들도 조만간 대피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했다. 하지만 후타바 병원이 속한 오쿠마정은 이 대피를 ‘대피 완료’로 이해하고 별도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같은 날 오후, 후쿠시마 1호기가 폭발하면서 대피를 지원할 수송지원대 도착마저 늦어져 결국 환자 구출은 다음날로 미뤄졌다.

3월13일 오전, 후쿠시마현 재해대책본부에 후송 지원이 이뤄지면서 구조가 재개됐다. 그러나 후송을 담당한 육상자위대 제12여단 사령부와 동북지역 총감부 사이에 역할 조정에 문제가 생겨, 실제 구조대는 그 다음날인 3월14일 새벽 4시 병원에 도착했다. 첫 번째 버스가 도착한 지 약 40시간 만이었다. 병원에 남은 환자 130여 명은 전기·난방이 끊긴 병원에서 이틀 밤을 지냈다. 이들은 대부분 노쇠했는데, 일부는 말기암 환자이기도 했다. 의료진의 도움이 상시 필요했지만 병원장을 제외하곤 모두 대피한 상황이었다. 일부 대피했던 병원 직원들이 다시 돌아오기도 했지만 그 수는 가장 많을 때도 6명에 불과했다. 부족한 인력에 촛불만 켜고 있던 병원에서 구조대가 오기까지 4명이 사망하고 1명이 병원 밖으로 나가 행방불명됐다.

3월14일 도착한 구조대 버스는 병원 환자 34명과 인근 노인보건시설인 ‘도빌 후타바’ 입소자 98명 등을 태우러 인근 소소 지역의 보건소로 향했다. 방사능 재난이 발생하면 피난민들의 방사능 오염 상태 확인과 제염을 위해 심사 절차를 밟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병원과 보건소를 오고 가려 했던 버스는 환자들 상태가 위중해지자 심사 절차 없이 곧바로 후송됐다. 그사이 버스를 기다리며 병원에 남은 나머지 환자의 구조는 또다시 늦춰졌다.


학교 체육관 바닥에 눕히는 데만 2시간

후쿠시마현 재해대책본부는 후타바 병원 환자들을 위한 대피소로 이와키시의 고요고등학교를 지정했다. 그러나 3월14일 오전, 후쿠시마 3호기마저 폭발하면서 구조대는 가까운 거리였음에도 우회 경로를 통해 환자를 수송해야 했다. 피난 거리는 230km로 늘어났으며, 계속되는 여진으로 고속도로에서조차 속도를 내지 못했다. 결국 병원에서 대피소까지 10시간이 걸렸고, 며칠째 제대로 간호받지 못한 노쇠한 환자 가운데 3명이 후송 중 추가로 사망했다.

불행은 대피소에서도 이어졌다. 당시 상황을 취재한 <마이니치신문>은 “대피소에서는 환자 병명은 물론 이름조차 모르는 상황이었고, 들것이 없어 학교 책상을 동원하는 등 환자들을 학교 체육관 바닥에 눕히는 데만 2시간이 걸렸다”고 전했다. 기저귀 등 기본 의료물품이 없어 교실 커튼을 잘라 사용했다. 학교장은 지역 라디오를 통해 시민들에게 도움을 구했지만 다음날 아침까지 환자 11명이 더 사망했다.

후타바 병원에 남은 환자 90여 명도 처참한 상황을 겪었다. 3월15일 오전, 병원에 도착한 구조대는 방사선 수치가 높아 구조대 소속 여성 간호사의 위험 등을 고려해 구조를 마치지 못한 채 철수했다. 구조대는 또 병원 별관에 환자가 있다는 사실을 전달받지 못해 환자를 남겨둔 채 ‘구조 완료’를 보고하기도 했다. 결국 사고 닷새 만인 3월16일 자정께 마지막 남은 환자 35명을 구조했지만, 인근 병원에서 수용을 거부하면서 대피소로 향한 뒤, 사망자는 모두 50명으로 늘어나게 됐다. 후타바 병원 근처의 다른 병원에서도 대피 과정에서 사망자가 발생했지만 이처럼 대규모는 아니었다. 구조대 사이의 매끄럽지 못한 연락체계, 구급차가 아닌 일반 버스를 이용한 구조, 진료기록·의료기기 없는 대피 등으로 생긴 참극이었다.

흔히 핵발전소 사고라고 하면 방사성물질에 따른 돌연변이나 기형아, 대규모 암 발생을 떠올린다. 하지만 이는 방사능 재난 초기에 나타나지 않는다. 수만 명이 한꺼번에 대피하는 상황, 특히 후쿠시마 사고처럼 자연재해에 의한 핵사고가 생긴다면 혼란은 더 커진다. 재난의 양상도 전혀 달라진다. 후타바 병원의 참극은 방사능 재난이 우리의 상상과 얼마나 다른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다. <도쿄신문>은 지난 3월 후쿠시마현 소재 20개 기초지방자치단체 자료를 바탕으로 현재까지 후쿠시마 사고 관련 사망자는 모두 1048명이라고 보도했다. 대부분 후타바 병원 참사처럼 방사능을 피해다니다 사망한 환자나 노령자, 또는 방사능 피해를 비관해 자살한 이들이다. 방사능 피폭에 따른 암은 곧바로 나타나지 않으며, 나타나더라도 핵사고와의 연관성을 입증하기 매우 어렵다. 그러나 이들은 분명한 ‘방사능 재난’에 따른 사망자이며, 핵사고가 없었더라면 생기지 않았을 희생자다.


4.3km 거리 295병상 규모의 ‘동남권의학원’

일본 후쿠시마현(반경 30km에 17만 명 거주)과 달리 우리나라 부산 고리 핵발전소 주변 30km에는 320만 명이 산다. 대규모 핵사고로 일본보다 더 큰 피해를 입을 수밖에 없는 이유다. 고리 핵발전소에서 4.3km 떨어진 곳에는 후타바 병원과 비슷한 295병상 규모의 ‘동남권의학원’도 있다. 부산 기장군이나 부산시의 ‘현장조치 매뉴얼’에는 일반 주민들의 대피를 위한 버스·철도 동원 계획은 있지만 병원 환자 후송 계획은 없다는 점에서 후타바 병원 사례는 더 큰 교훈을 준다.

방사능 재난은 결코 몇몇의 핵공학자·기술자가 막을 수 없다. 사고를 수습하는 데 이들의 도움이 절실하지만, 국민을 안전하게 대피시키고 2차 재난을 막는 건 군대·경찰을 비롯한 국가 전체가 나서야 한다. 박근혜 정부 들어 장관급→차관급으로 격하되고 인원이 100여 명에 불과한 원자력안전위원회가 과연 이 모든 재난의 주관 기관으로 제 역할을 할 수 있을지 검토해야 한다. 세월호 참사 이후 국가 방재 시스템을 전반적으로 재편하고 있는 지금, 후타바 병원 참사로 우리나라의 방사능 방재를 되돌아볼 수 있어야 한다.


이헌석 에너지정의행동 대표